지극히사적인이야기

시험까지 1시간밖에 남았다. 전날 뭘 하느라 새벽까지 있었는지 기억도 까마득한데, 아픈 머리 움켜쥐며 잠에서 깨니 급하게 준비하고 나가기에도 빠듯한 시각. 아 이번 시험도 공부따위 안하고 그냥 보겠구나. 뭐, 언제부터 착실한 학생이었다고.

신호를 유난히도 잘지키는 애꿎은 버스기사를 저주하며 학교 앞에 내리니 4시 5분. 시계가 10분 빨리 맞춰져 있으니 3시 55분인 셈이다. 강의실까지 뛰어가는데 5분. 따악 맞춰 도착하겠다. 시험전에 노트필기 스윽 보고 급암기하는 신공을 피울랬더니 그것도 안되겠군. 지금 이 순간 어디 하나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몸이 원망스럽다. 차라리 병이라도 났으면 시험 쨀 핑계나 있지. 7학기째 기말고사 첫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게 우습다.

차에서 내려 주섬주섬 가방 속에 지갑을 넣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눈 앞을 스윽 지나간다. 관악산에 산책이라도 다녀온 모양? 등산객들에게 유명한 학교가 싫다. 정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노점상들은 더욱더. 코맹맹이 목소리의 고속도로 테이프서부터 뻔데기, 찐옥수수, 은박돗자리, 썬캡, 막걸리. 어휴

가뜩이나 시험 때문에 짜증 가득한 마음에 여러모로 까칠해져 주시고. 방금 지나친 자전거가 떠오른다. 그 사람, 덧니가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지나간 쪽을 살펴보니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 마른 몸에 어색할 정도로 풍성한 인도풍의 바지. 페달을 밟는 속도만큼 바람이 들어가 뒤에서 보이는 그 이국적인 바지는 풍선처럼 커져있다. 묘하게 몸뻬, 같다고도 생각했다. 물론 그보단 훨씬 세련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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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어렵지도 쉽지도 않았다. 딱 공부 안한만큼 쳤다고 생각했다. 이제서야 하나가 끝이구나. 앞으로 남은 다섯개가 차례차례 떠오른다. 입에 담기도 버거운 전공과목 이름들에 닭살이 좌악. 입을 조물조물거리면서 기계처럼 속으로 스케줄을 읊으니 이번 학기에 이걸 어떻게 다 들었나 싶다. 어쨌든, 이제부턴 진짜 전쟁이다. 아 맞다 내일은 시험이 2개지.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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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30분. 1시. 계량경영학. 관리회계. 아침부터 무서운 것들이 차례로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넉다운됐다. 이런 걸 대체 어따 써먹으란 말이야, 세상이 어디 이런 숫자놀음으로 쉽게 풀리긴 해? 툴툴대고 싶어도 벌써 시험을 마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에 돌아가고 있다. 다음날 있을 기말고사를 다들 준비하겠지.

심란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온다. 누구를 불러서 한바탕 술을 마셔제낄 기운도 깡도 없다. 잠깐 전산실에 들러 인터넷을 해본다. 하릴없이 조잡스런 기사에 낄낄낄. 등돌리면 까먹어버릴 가쉽들, 특종과 대박에 목마른 누군가는 그것도 기사랍시고 올려놨고 시험을 방금 망친 또다른 누군가는 무슨 중독처럼 자극적인 제목들을 클릭해댄다. 서로 잃는 건 없으니, 아쉬운 장사는 아닌건가.

시간은 죽였지만 마음은 줄어들지 않는다. 착잡, 한심, 절망, 짜증, 좌절, 무기력, 씁쓸,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터덜터덜 정문을 나선다. 억지로 기분을 떠보려 엠피쓰리를 귀에 꽂아도 음악은 주변만 헛돈다. 햇빛이 따가웠는지,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이런 구겨진 마음으로 집에 가기 싫다. 한스밴드의 노래가 떠오른다. '시험을 망쳐서 오락실에 갔다'는. 오락실까진 아니더라도 어쨌든 지금은, 그냥 들어가기 싫다. 쭈뼛쭈뼛, 버스정류장에 가까워지면서 저절로 걸음이 느려진다.

띠링- 벨을 울리고 무언가 쉭 지나간다. 재빨리 코끝을 지나치는 향기가 익숙하다. 사람 이름은 까먹어도 한번 맡은 체취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 눈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돌린다. 눈치없이 갑자기 몰려들어오는 햇빛에 순간 깜깜해지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건 분명히 아는 자전거다. 그리고 자전거 위의 몸뻬도, 아는 소녀다.

급하게 시계를 본다. 4시 5분. 4시 5분. 10분 빠르니까 3시 55분. 4시 5분전. 지난날 자전거 씨를 마주쳤던 시각을 계산하는 사이에 이미 소녀는 저만치 또 달려가고 있다. 뛰어가서 자세히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 덧니, 까맣고 짧은 머리, 큰 눈, 그리고 덧니가 보일 정도로 크게 웃고 있던 기분좋은 입모양. 그것밖에 기억이 안난다. 더 보고 싶다.

멈칫하는 사이 소녀는 조오기 앞에 자전거를 멈추고 버스정류장 기둥에 덕지덕지 붙은 종이포스터들을 살펴보고 있다. 머릿속이 하얗다. 엇 주문을 건적은 없는데, 내가 속으로 말한 걸 혹시 들은거야 자전거 씨? 친한 척 하고 싶다. 우리 어제 이 시간에도 여기서 만났던 거 아세요. 이렇게 다짜고짜 들이대도 웃기만 할 것 같다. 어디 가세요, 뭐하는 사람이에요, 나도 이 주변 사는데, 하하, 긁적긁적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괴롭히는 와중에 소녀는 다시 자전거를 돌려 가던 길을 간다. 소녀는 달리고, 나는 아쉽다. 지금 뛰어가면 인사라도 할 수 있을거야. 엉거주춤 서있다가 무작정 걸음을 옮긴다. 너무 급히 뒤에서 달려가면 당황할지도 몰라. 미적미적 조심스럽지만 점점 발이 빨라진다.  


앗. 섰다. 달리다가 왜 또 멈춰섰을까. 생각이고 뭐고 없이 뛰다가 정말로 따라잡을 만큼의 거리가 되니 또 당황스러워 나도 따라서 멈칫. 소녀는 아직도 샤방하다. 뭐가 그리 좋길래 웃고 있을까. 어제도, 그렇게 웃고 있었으면서.

자세히 보니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흐릿한 시력에 눈을 빠꼼거린다. 가방에서 안경이라도 꺼낼까,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 침만 꼴깍꼴깍. 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걸까. 멈춰있으니 지금이라도 걸어가면 가까이서 볼 수 있을텐데.


어찌할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파란불. 이날따라 왜 이렇게 빨리 바뀌는지. 소녀는 기다린듯이 페달을 밟고 힘차게 건너간다. 넓고 넓은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씽씽씽. 점점 멀어지고 나는 더이상 삼킬 침도 없다. 바싹 마른 입을 혀로 몇번 훑는다. 잊고 있던 엠피쓰리는 계속 잘 돌고 있고, 여전히 따가운 햇빛에 나는 돌연 어지럽다.

by 발칡 | 2007/06/27 05:16 | 미운 24살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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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지극히사적인이야기2
(상략)지난 밤 같이 잔 사람에게는 다음날 예의상이라도 문자 하나 보내줘야 한다는 친구의 조언. 아하, 그래서 지난 번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독한 짓을 했던 것이었나. 작년 이맘때 출국을 앞두고, 드라마에서 봤던거마냥 혹시라도 불꽃같은 인연이 생기지는 않을까 허황된 기대를 품고 처음 갔던 번개자리에서 만난 사람. 그 사람이나 나나 피차 바라는 바가 없어서였을까, 아쉬운대로 들이대주시길래 무미건조한 밤을 보내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다시 연락 주......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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