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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같이 잔 사람에게는 다음날 예의상이라도 문자 하나 보내줘야 한다는 친구의 조언. 아하, 그래서 지난 번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독한 짓을 했던 것이었나. 작년 이맘때 출국을 앞두고, 드라마에서 봤던거마냥 혹시라도 불꽃같은 인연이 생기지는 않을까 허황된 기대를 품고 처음 갔던 번개자리에서 만난 사람. 그 사람이나 나나 피차 바라는 바가 없어서였을까, 아쉬운대로 들이대주시길래 무미건조한 밤을 보내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다시 연락 주고받을 사이는 아닐 것 같아 이후 몇번 연락을 씹었더니만 번개를 주최했던 커뮤니티든, 손에 꼽지도 못할 나의 몇안되는 이쪽 친구들에게든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려 놨다. 그래, 한국에 잠깐 없던 사이 소문만으로는 아주 찢어죽일 년이 되어있더군. 뭐, 어차피 그쪽물에 다시 발 들여놓을 일은 없을 것 같아 클럽은 탈퇴하고 싸이는 세컨아이디를 썼으니 신경도 안쓰고 있었단 말이지. 이후 한국에 돌아와 새로 알게 된 언니를 만나러 간 자리, 아는 동생을 소개해준다길래 이름을 물었더니 누구누구라더라. 이름을 듣고도 전혀 눈치를 못챘는데 막상 얼굴보니 떠오르는 안좋은 기억. 헉, 그때 그 사람. 돌려서 물어봤더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사람은 날 기억못하시더군(모르는 척이었을 수도). 십년감수했다고 생각하고 태연한 척 돌아왔는데, 집에 와 생각해보니 기분이 찜찜한 것이. 흥, 내가 그렇게 임팩트가 없었어?
설마 오늘 만나는 이 사람은 그렇게 끈질긴 사람은 아니겠지. 어제 클럽에서 1시까지밖에 안놀았는데 왜 이렇게 몸이 뻐근한걸까. 여자 나이 스물다섯이면 노화가 시작된다던데 진짠가보네. 씻고 나가기도 귀찮은데 모텔은 어디로 가고 콘돔은 또 어디서 구하지. 애인이랑 잘때든, 혹은 다른 남자랑 잘 때든, 한번도 콘돔을 내가 사본적이 없어. 에라 어떻게든 되겠지. 만나서 안꼴리면 그냥 집에 보내고.
하는 내내 침대에서 외롭다는 말을 꺼내는 이 사람.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원나잇만 하기로 합의를 봤으면 그런 구질구질한 얘기 안꺼내는 게 예의 아니야? 누구든 자기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존재로 생각되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외롭다> 라고 자기 입으로 직접 내뱉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 외로워뵈는 사람 보지 못했어. 이보세요, 저는 요즘에도 하루 2번은 꼬박꼬박 자살 생각해요. 목매기, 손목긋기, 목긋기, 약먹기, 밤길에 무단횡단, 옥상에서 고공점프, 고2때부터 안해본게 없어요. 나보다 더 외로워요? 이런 얘길 들려주면 어떻게 될까. 열심히 제 흥에 겨워 내 위에서 왔다갔다 하며 '외로움'을 푸는 이 사람. 아, 깔렸는데도 이렇게 무감각하긴 처음이야. 차라리 내 손으로 혼자 하고 말지.
<다음 번에 딴 사람이랑 할 때는 같이 씻자는 말 하지 마요>
<?>
<처음 보고 같이 잔 사람이랑 샤워 같이 하는 사람이 어딨어. 난 애인이랑도 이런 거 안해봤어.>
굳이 머리까지 감겨주실 필요는 없었어요. 뭐, 새로운 경험이긴 했지만. 이 사람 꽤 판타지가 컸나보군. 처음 맞구나. 아 정말 난 거절을 못해서 탈이야. 꿍얼꿍얼
나와보니 새벽 1시. 집이 먼 그 사람을 먼저 택시 태워보내고, 나도 서둘러 택시를 잡으며 최근 통화기록을 살핀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어떤 번호를 찾아 수신거부, 띡. 이 기능을 쓸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혹시라도 전화가 올 때를 대비해 피할 구멍을 만들어놔야지. 오늘 골치 아픈 사람을 만났군,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진동이 드르르. 아차, 문자거부 기능은 안되는구나.
<너 내 스타일이야, 풉>
이어서 따라온 문자,
<하지만좋아하진않을거야>
택시는 시원하게 서울대 정문을 지나 녹두로 달려 들어오고 나는 마음이 급바뀐다. 그래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돈많은 연상이라. 몇번 더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상대가 맘에 들지만 좋아하기는 싫다는 사람과 맘에 들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보는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불쌍한걸까. 누가 더 외로운 걸까. 한번의 잠자리로, 몸으로 풀릴 외로움이었으면 진작에 풀렸을까. 그럼 그 사람은 덜 외로워졌을까. 그럼 난..?
조금은 다정함이 묻은 답문을 보내야지. 번호를 저장해둬야겠다.
잠깐, 근데 이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